2016년 2월 12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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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를 읽고나서(4) Up

완득이를 읽고나서(4)

완득이를 읽고나서(4)

완득이를 읽고나서

청소년 소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작가들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글 쓰는 일 자체에 의의를 둔 다는 것이다. 청소년 소설을 많이 간행한 모 출판사에선 `청소년 소설`을 청소년과 성인의 다른 점을 궁리해보는 글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그 출판사에서 낸 `깨지기 쉬운, 깨지지 않을`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대부분이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청소년 시기를 모두 거치고 성인이 된 작가들이 성인과 청소년의 다른 점을 고민해보는 `청소년 소설`을 쓰면서 그 주인공으로 청소년, 그것도 현대의 청소년을 내세우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나는 그들이 성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성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만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청소년 시기와 성인이 된 이후를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청소년이 아니라 성인이다. 그렇다면 양쪽의 차이점을 말하려면 성인이 된 그들 자신의 페르소나를 내세우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이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은 요즘 세대의 청소년들이다. 이들은 요즘 세대의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는 일 자체를 요즘 세대와 소통(을 제안)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문학이 본래적으로 가지는 소통의 기능을 되려 무시하는 행위이다. 소설을 쓰고 읽는 게 소통이 될 수 있다면, 소설 안의 주인공이 어느 세대이든, 그리고 독자가 어느 세대이든 중요하지 않다. 물론 각자 다른 세대에 속하는 독자들은 서로 다른 감상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이 서로 다른 감상을 가지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단지 다른 세대에 속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과 가치관과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청소년과 소통하기 위해선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써야 한다고 믿는 듯한 일부 작가들의 태도에는 이런 상식을 무시하며 문학이 소통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냉소하는 차가운 면이 엿보인다. 그리고 더 끔찍한 것은 이들이 주인공으로 내세운 청소년들의 모습이다. 청소년 주인공들은 그들 나이 때에만 가질 수 있는 고민, 엄밀히 말하자면 기성 세대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가질 만한 경직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전형적인 고민에 빠져 있고, 성인 작가들은 청소년들이 자기 나이 때에만 가질 수 있는 고민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서 성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청소년 소설은 청소년과 성인의 차이점을 고민해보는 장르이기 때문에 청소년과 성인은 전혀 다른 존재로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성인이 쓴 글이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청소년은 성인과 같은 고민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성인에 상반되는 분류로서 청소년을 하나로 묶으면서, 드랍 아웃된 자퇴생이나 매일 학교에서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껴야 하는 일부 학생들의 위치가, 그들 또한 `청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현상이 일어난다. 청소년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느끼는 것은 청소년이라면 이래야 한다고 말하는 어른들의 전체주의적인 인식이다.

그리고 대표적인 청소년 소설인 `완득이`. 내가 `완득이`를 처음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일관된 주제 의식 없이 흐르는 이야기의 구성이 마치 청소년들의 학교 생활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50분 동안 공부하고, 10분 동안 쉰다. 무엇을 언제 공부하는지, 밥은 언제 먹고, 하교는 언제하는지 정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 청소년들의 주체성 없는 생활은, 갈등으로 주제 의식을 풀어나가는 대신에 캐릭터에 이끌려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 시트콤 같은 소설을 닮아 있다. 하지만 김려령 작가가 그것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완득이`와 학교 시스템을 동시에 비난할 수는 있어도 이것을 가지고 시대 의식이니 현실 반영이니 하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완득이`에게 뒷세대에게 우리 시대를 증거할 수 있는 시대 의식을 발견할 수가 있는가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완득이`의 첫 부분에서 도완득의 담임 선생님 똥주는 세상은 불합리한 것이라서 어차피 소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열외될 테니 차라리 노력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똥주는 뒤에도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세상이 불합리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현실에 대한 문제 의식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현실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계속 주지시킴으로써 독자가 부조리에 면역을 갖게 하여, 현실의 불합리를 인식하고, 비판하고, 대항할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에 더 가깝다(여담이지만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맞은 첫 번째 수학 시간에 선생이 비슷한 소리를 지껄였었다). 그런데 `완득이`의 세상이 등장 인물에게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차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일단 주인공부터가 약자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강자이다. 남주인공 도완득은 주먹이 세고, 여주인공 정윤하는 가슴이 크다. 한 사람은 남성성의 화신이고, 또 한 사람은 여성성의 화신이다. 도완득은 학교 시스템 내에서 열등한 성적을 거두지만 싸움을 잘하는 적성을 살려서 킥복싱을 시작하고, 정윤하는 도완득의 매니져가 되어서 `내조`를 한다. `완득이`에서 도완득과 정윤하는 각자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이들이 자신들의 적성을 살려서 사회에서 살아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은 부조리와 불균형을 생산해내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이의를 `세상은 원래 좆같은 거야`라는 말로 덮어둔 다음에 등장 인물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상을 주면서 마치 그 부조리와 불균형이 사라진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며, 개개인이 약자의 위치에서 벗어남으로써 거대한 차원에서 반복되고 있는 부조리와 불균형에 피해를 입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우리 세대의 가치관의 흔적이다. 도완득의 담임인 똥주 또한 마찬가지이다. 똥주는 `세상은 원래 부조리하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외국인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인 아버지를 뒀으며, 아버지의 자본을 통하여 노동자를 도와주고, 가난한 도완득의 아버지를 도와준다. 참 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위선적인 설정이다. 그러므로 부득이하게 했던 말을 반복할 수 밖엔 없는 거 같다. 난쟁이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를 뒀지만 혼혈이라는 점이 티나지 않는 얼굴에 키는 훤칠한 아이가 ,세상이 뭐같다고 외치지만 사실은 주변 사람들을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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