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2일 금요일

블레이드 러너를 보고나서(4) DownLoad - 식물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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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를 보고나서(4)

블레이드 러너를 보고나서(4)

블레이드 러너를 보고나서

미래에 인간이 아닌 인간은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인조인간이다. 많은 SF영화들에서 인조인간들은 단순히 모양만 인간이 아닌 정말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등장한다. 사랑과 슬픔 같은 감정을 느끼고 이 작품의 레이첼처럼 뇌에 저장되어 있는 추억을 기억할 수도 있다. 데카드는 이런 레이첼을 사랑하게 되고, 인조인간인 레이첼도 데카드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들이 창조한 인조인간들에게 많은 한계와 제약을 부여한다. 수명이 4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영화 속 인조인간들의 한계다. 인조인간이 인간과 아무리 흡사하다 하더라도, 아무리 똑같이 창조하는 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인조인간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인간과 다른,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삶 속에서 느끼게 된다. 로어 뱃티가 그랬다. 언젠가 인조인간이 인간이 되는 날이 오게 된다면-과학의 발전은 모든 불가능한 것들을 누릴 수 있게 해주지 않았던가―인간의 존재 자체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인간 존재의 숭고함과 그 존재 자체의 가치는 사라지는 것인가. 최선의 방법은 인조인간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이 존재할 수 없고, 그로인해 괜한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과학과 시대는 인조인간을 부르고 있고, 인조인간과 인간이 어떻게 공존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SF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미래 사회는 과학이 발전함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통제도 강력해진 사회다. 모든 인간의 데이터베이스가 전자화되어 저장되고 기록에 남는다. 어떤 SF소설에서 인간들은 소마라는 약으로만 연명하게 되고, 또 다른 SF영화에서는 유전자의 우열이 권력이 되는 시대가 등장하기도 했다. 「블레이드 러너」는 인조인간과 인간의 이야기지만, 인조인간도 사실 통제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수많은 SF영화나 소설들에서 인조인간들이 경찰이나 군대의 모습을 하고 등장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통제 방법이 생명을 가진 인조인간이라는 점에서, 여타의 통제 수단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그런 차이점 중에 하나가 바로 인조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인간 존재 이유를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미래사회에서 인조인간들도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주장한 명제는 모순이 된다. 인조인간은 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이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명제는 인간에 한해서만 적용되어야 옳다. 하지만 명제를 뒤집어 보면, 생각하는 것만이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조인간은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인조인간은 인간이라는 뜻이 된다. 모순이다. 때문에 인조인간과 인간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데카르트의 명제는 좋은 예시가 될 수 없다. 가장 좋은 차이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조인간의 한계다.

SF작가들이 인조인간을 만드는 목적은 무엇인가. 단순히 인조인간과 인간이 행복하게 공존하는 사회를 그린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한 인조인간의 비애를 통해, 미래사회의 모습이 정말 행복할 수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애초부터 인조인간을 비극적인 존재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비극적인 존재로서 인조인간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인간에 의한 통제다. 비극은 단순히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주인공의 상황을 보고 비극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극은 한계를 미리 설정해놓은 인조인간의 처지에 매우 잘 어울리는 단어다. 로어 뱃티는 자신이 4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인간들이 자신의 수명을 정해놓았다. 이로 인해 로어 뱃티는 반란을 꾀하지만 그도 어떨 수 없는 인조인간이었다. 인조인간은 결코 인간을 이길 수 없다는-인간이 결코 하느님을 이길 수 없듯이-불변의 진리가 또 다시 성립되어 그는 수명이 다하여 죽게 된다. 여기서 그의 죽음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는데 첫째, 그가 데카드(인간)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데카드의 생명을 구해준 것. 둘째, 인조인간은 결코 인간을 이길 수 없다, 라는 종래의 법칙이 확인 된 것. 셋째, 작품의 줄거리 측면에서 본다면 적대시 관계였던 데카드의 생명을 구해줌으로서 일련의 반전을 꾀하고 있다는 것 등이 되겠다. 특히 첫째 이유는 많은 SF작가들이 인조인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인조인간이 아무리 사회와 인간에게 불만을 가져도, 인조인간의 운명은 인간을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만 봐도 그렇다. 블레이드 러너는 인조인간을 ?는 '인간'이다. 작가들은 인간을 통해 인조인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한계가 있는 미래의 인조인간을 통해 인간을 나타내려 한다. 하지만 많은 SF작가들의 이러한 생각과는 달리, 과학은 정반대의 모습을 나타낼지도 모른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조인간과 인간이 전혀 구분 없는 사회가 된다면 누구를 통해 누구를 나타내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지만, 만약 인조인간이 인간의 위에 위치하는 날이 오게 된다면, 그때 작가들은 인간을 통해 인조인간을 나타내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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