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2일 금요일

유령을 읽고나서(3) 자료 -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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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을 읽고나서(3) 자료

유령을 읽고나서(3)

유령을 읽고나서(3)

유령을 읽고나서

작품의 구조는 단순했다. 아마 그것이 희곡이라는 장르 구조를 대표하기라도 하듯이, 희곡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단순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일단 「유령」의 무대는 변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한 장소에서 작품이 끝날 때까지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가운데 원탁이 놓여있는 방에서 모든 대사와 행동이 이루어지며 작가는 자신의 생각과 주제를 이 방 안에서 집약시킨다. 모든 연극의 무대는 하나다. 연극 도중에 관객이 일어나서 다른 연극 무대로 가는 경우는 없다. 극작가들은 이 하나의 무대를 변형시키고, 다른 장치들을 설치하며 새로운 국면의 서사를 끌어내야 하는데, 이 작품은 심지어 그런 무대의 변형도 없다. 등장인물들은 작품 끝까지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일어서며 이야기하는 것을 반복하며, 주인공인 오스왈드 알빙이 자신이 어머니와 이야기하던 그 의자에서 죽어버림으로서 극은 끝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작품을 읽는 내내(연극은 하나의 무대, 장면으로 전체를 보여주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서사가 과거부터 이어져 내려온 커다란 강물의 일부분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사실 연극을 순간적인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연극의 많은 배우들은 제각기 사연이 있다. 흥미로운 과거가 있으며, 이 작품의 헬레네 알빙처럼 남편에 대한 처절한 비극도 있다. 그러한 비극이 연극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독자들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만데르스 목사에게 남편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독자들은 헬레네의 남편이 사회적 평판과는 달리 방탕한 무능력자임을 알게 된다. 모든 연극이 마찬가지겠지만, 이 작품의 등장인물 다섯 명(헬레네 알빙, 오스왈드 알빙, 만데르스 목사, 엥스트란드, 레지네 엥스트란드)은 중심 서사에서 전혀 벗어나 있지 않다. 다른 연극이라면 주변 인물 두세 명쯤은 따로 등장해서 작품의 흥미를 더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 다섯 명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가족의 이야기의 중심적인 인물들이다.

작품은 오스왈드 알빙의 죽음으로 끝이 나지만, 주제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작품은 그가 죽음으로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악(惡)의 유전. 텍스트를 읽고도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어 인터넷을 뒤져봤더니, 방탕자인 아버지에게 오스왈드 알빙은 성병이 유전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러한 질병을 얻은 오스왈드는 죽게 된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오스왈드 알빙이 사랑하고 아끼던 그 집의 하녀 레지네 엥스트란드가, 그의 배다른 누이였던 것이다. 해설은 이러한 장면에서 작품이 마치 「오이디푸스 왕」을 연상시킨다고 쓰고 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극도 비극이지만, 작품의 주제. 즉, 아버지의 악(惡)이 아들에게 고스란히 유전되어 마치 집안에 유령이 있듯이 과거의 비극이 그대로 재현된다는 주제이다. 이러한 주제는 서구의 작가들도 많이 사용하지만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이미지하고도 많이 닮아있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는 말을 우리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자식이 난다는 말이 있고, 폭정을 일삼던 원님이 죽고 그 원님의 아들이 그대로 그 못된 성질을 이어받아서 백성들만 괴롭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제목이 '유령'인 것이다. 유령은 죽어서도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다. 그 아버지의 영혼은 자식의 몸에 들어가서 고스란히 과거의 삶을 회상시킨다. 그의 아버지가 하녀와 관계를 맺어 레지네 엥스트란드를 낳았듯이, 그의 아들 오스왈드 알빙도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하여 하녀인 레지네와 관계를 맺으려 한다. 김동리의 「역마」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타고난 역마살의 소유자 체 장수의 아들 성기는 어느날 주막으로 굴러들어온 계연을 좋아하게 되지만, 계연이 자신의 배 다른 누이임을 알고 절망한다. 떠돌이가 되는 것만은 막으려 했던 성기의 어머니 옥화의 노력에도 성기는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역마살을 어쩌지 못하고 떠돌이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유령」과 「역마」뿐만 아니라 세상 많은 나라에는 이와 같거나 비슷한 모티프를 가진 문학이 많이 있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끝에 가서 죽게 되는 비운의 주인공이 오스왈드 알빙인데도 주인공이 오스왈드 알빙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차라리 오스왈드 알빙의 어머니 헬레네 알빙이라고 느껴졌다. 헬레네 알빙은 그 시대 여성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참고, 인내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여성상은 동서양어디서나 마찬가지였나 보다. 만데르스 목사는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고 가출한 헬레네 알빙을 질책하지만, 헬레네 알빙에게 의해서 가정의 진실이 밝혀지고 헬레네 알빙의 결백이 밝혀진다. 작가는 이런 결백하고 주체적인 여성을 표현하는 동시에 더 이상 남자에게 명령받지 않고, 오히려 남자의 위에서 주도권을 쥐고 행동하는 여성을 보여준다. 병자가 된 오스왈드 알빙을 간호할 수 있는 사람은 여성인 하인 레지네 엥스트란드 뿐이라는 것과, 더 이상 참기 힘들어진 오스왈드 알빙이 모르핀을 주며 죽음을 부탁하는 사람도 역시 여성인 헬레네 알빙이다. 작가는 이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대표작 「인형의 집」에서도 여성의 해방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작가만의 독특한 사유와 사상이 그를 현대극의 시초라는 명성을 주었다.

희곡이라는 장르가, 어쩌면 소설보다 더 매력적인 장르다. 입센의 「유령」같은 좋은 희곡을 읽을 때, 독자는 한번 전율을 받고,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역할을 연기할 때 관객들은 또 한번 전율을 받을 것이다. 나는 때때로, 아직 극화되지 않은 소설들의 극화를 생각한다. 요즘에는 비록 복잡한 구조를 가진 「빼드로 빠라모」를 무대에 올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관건은 어떻게 「유령」처럼 한 장소에서 그 복잡한 서사와 과거 회상을 가능케 하냐는 것이다. 물론 많은 부분 생략을 해야겠지만, 한 부분만을 무대에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상황과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과거가 존재하게 하고, 그 무대가 강물의 한 부분인양 서사에 역사성을 부여해야 한다. 결국 연극에서는 사건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보다는 많고 많은 사건들 중 어떤 사건을 무대에 올려 관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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