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2일 금요일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나서(3) Report - 자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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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나서(3) Report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나서(3)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나서(3)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나서

카프카. 내면을 사랑한 이 사람에게 고뇌는 일상이었고, 글쓰기는 구원을 향한 간절한 기도의 한 형식이었다. 묘비명.

그레고르 잠자는 평범한 회사원, 보다 정확하게 장거리 영업직원이다. 어느 날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거대한 갑충으로 변신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지 않는다. 5년 전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모든 것을 잃었을 때부터 잠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왔다. 그리고 벌레로 변한 지금 그에게 제 일의 관심사는 자신이 돈을 벌지 못하면 가족은 누가 먹여 살리는가이다. 그러나 잠자의 걱정과는 달리 아버지는 현명하게도사업에 실패했을 때에도 아주 적은 재산이나마 사실은 남겨두었었고, 그로 인해 이자가 불었으며 잠자가 벌어다 준 돈도 절약해서 약간의 목돈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하지 않았던 그 약간의 재산으로 사장에게 진 빚을 갚았다면 잠자는 좀 더 일찍 직장을 그만 둘 수 있었겠지만, 잠자는 오히려 지금에 와서 보니 아버지의 조심성과 절약이 더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벌레인 잠자를 경악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가지고 바라보던 가족들은 점점 잠자라는 존재가 버거워진다. 그리고 귀찮아지고, 짐스럽다. 잠자가 죽는다. 아니 벌레가 죽었다.

"그들은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함께 집을 나서 전차를 타고 교회로 나갔다. 오붓하게 그들 가족만 앉아 있는 전차 안으로 따스한 햇살이 흘러 들어왔다. 그들은 좌석에 편안히 몸을 기대고, 장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앞날의 전망이 썩 나쁜 것도 아니었다...... 전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딸이 제일 먼저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그런 딸의 모습을 통해 잠자 부부는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들을 확인 받는 느낌이었다."

'변신'은 '인간 소외'의 문제를 가장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그러나 그로테스크하게 다룬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헤겔이 처음으로 사용한 '소외'란 개념은 마르크스에 의해 유명해졌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노동자가 노동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상황을 말한다. 노동이란 원래 인간이 노동을 통해 얻어진 생산물을 향유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노동자에게 오히려 강압으로 작용하면서 노동자는 자신들이 생산한 생산물을 향유하지 못하고, 노동 그 자체를 위해서 노동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노동은 인간이 행복한 삶을 향유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노동이 오히려 인간을 수단으로 만들고, 노동 자신이 목적이 되는 '전도'가 발생한다. 그레고르 잠자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 가족이 행복해지는 것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실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가족의 행복은 잠자에게는 자아를 실현하는 통로이다. 그렇다면 잠자는 자아를 실현하고 행복을 얻었는가 결과는 처절한 죽음이다. 왜냐하면 가족의 행복이 주인이 되고, 잠자의 자아실현은 노예가 되는 전도된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참 부조리하고, 모순적이다. 왜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 잠자는 죽어야 하고, 잠자의 헌신과 희생으로 먹고 살았던 가족들은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미래를 보장받아야 하지 이것이 바로 '소외'이다. 카프카는 '변신'을 통해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가족관계'를 해체시킨다. 가족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감싸는 소중한 공간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소설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이라는 개념, 또는 사랑이라는 것, 헌신과 희생이라는 것 속에 숨겨져 있는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한다. 우리 주변을 더듬고, 눈을 가늘게 떠서 구석구석을 보면 왜 카프카에게 일상이 고뇌였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잃은 적이 있었다. 말이 뱉는 그 뒷감당을 못하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질려서, 말을 하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마냥 비웃음과 빈정거림만 던졌다. 지금도 나는 사람들을 보면 어정쩡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고,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지, 왜 저들은 저렇게 떠들고 있는지, 왜 감당할 수도 없는 얘기들을, 스스로 모순되는 저런 말들을 왜 하고 있는지. 잠자의 가족들은 잠자가 돈을 벌어다 줄 때 얼마나 그를 칭찬하고 사랑한다고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그것은 돈과 함께 끊긴다. 돈만이 아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정말 자식이라는 이유만일까 부모가 원하는 그런 자식의 모습에 부합되기 때문이 아닐까 핏줄이 정말 있을까 키울 때는 영락없이 자기 자식이라고 믿다가 뒤바뀐 아이라는 걸 알고 다 자란 아이들을 바꾸는 부모는 핏줄 때문이었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정말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일까 그 사람의 능력을 사랑하거나 학벌을 사랑하거나 자기 콤플렉스를 대신해 줄 그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사회에 너무나 널린 소외들을 매일 매시간 접하고 허부적거리며 산다. 그런데 이 소외가 누군가의 말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조아들이 만들어 낸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야기될 수밖에 없다는 헤겔의 소외에 내가 더 고개를 끄덕이기 때문에 '변신'은 끌어안고 살 수 밖에 없는 책이 되었다.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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