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2일 금요일

죄와 벌을 읽고나서(3) 등록 - 무료예쁜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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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을 읽고나서(3) 등록

죄와 벌을 읽고나서(3)

죄와 벌을 읽고나서(3)

죄와 벌을 읽고나서

라스꼴리니꼬프는 고리대금업을 하는 노파를 죽였지만 이것을 단순한 살인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살인을 하게 된 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만의 논리적인 이론과 사상에 의해서, 그가 비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세계는 만만치 않았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경계선을 넘었지만 나폴레옹처럼 영웅이 되지 않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다. 그는 자신을 나폴레옹처럼 세계를 바꿀 몇 안 되는 비범한 인물로 생각했지만, 세계는 '그의 자존심을 구기고' 그를 끝까지 추적하세 죄에 상응하는 벌을 내렸다.

이것은 모순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입장에서, 그는 그의 정확하고 빈틈없는 논리(이 주장을 논문에도 기재했었다)에 입각해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한 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에게 노파는 세상에 해악이 되고 필요 없는 존재였으므로, 그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 죽인 것이다. 사람을 죽인 것으로 벌을 받아야 한다면, 수많은 전쟁을 일으켜서 군인들과 무고한 시민들을 죽게 만든 나폴레옹은 벌을 받지 않고 왜 영웅대접을 받는가. 라스꼴리니꼬프는 이것이 항상 의문이었다. 그는 고독한 지식인이었으며 그가 그의 신앙으로 삼았던 사상은 처음부터 인간 본연의 양심과 선을 배재한 것들이었다.

작품 속에서, 라스꼴리니꼬프는 끊임없이 분열되는 자기 내면과 갈등한다. 선한 인간 본연의 양심과 대립되는 자기 사상에 입각한 논리가 갈등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인물의 구조도 선/악으로 극명하게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것은 작품 뒤에 딸린 해설을 보고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해설에 따르면 두냐와 소냐는 선에, 두냐의 사윗감이었던 루쥔과 사기도박꾼 스비드리일로프는 악에 속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이 두 가지의 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말 도스토예프스키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선/악을 철저히 구조화해서 그것을 의인화시키는 힘은 다른 작가들에게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문제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꼴리니꼬프라는 하나의 인물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겪고 있는 내면적 갈등을 세계 밖으로 꺼내서 형상화하는 것에 성공하고 있는데, 인물과 배경 하나하나가 라스꼴리니꼬프의 심리를 묘사하거나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해서 탄생된 이 세계는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세계이다. 모든 것은 라스꼴리니꼬프가 그의 사상으로 노파를 죽인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며 그가 겪게 되는 선/악의 갈등, 사상의 갈등, 양심의 갈등은 그에 알맞은 인물과 사건들로 형상화된다. 예를 들어, 마지막(에필로그)에 가서야 라스꼴리니꼬프를 진정으로 갱생시키는데 성공하는(사실 해설을 쓴 꼰스딴찐 모출스키는 이 장면에서도 라스꼴리니꼬프가 진정 부활에 성공했는지 의심스럽다는 투로 말하고 있다) 소냐는 자신의 몸을 판 벌로 고난을 받고 있음에도 끝까지 선의 편에 서서 라스꼴리니꼬프를 인도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창녀다. 가족을 위해 몸을 팔았지만 그녀는 스비드리일로프처럼 인간 본연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비록 몸은 팔았다 하더라도 인간성은 그대로 지닌 인물인 것이다. 그녀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십자가를 주고 센나야 광장에 입을 맞추고 죄를 고하라고 말한다. 그녀는 라스꼴리니꼬프가 버렸던 기독교 신앙을 부활시키고 어둠과 추악함으로 가득한 페테르부르크를 인간이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만드는 한줄기 빛이다.

어디까지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간 본연의 양심이 아직 라스꼴리니꼬프에게 남아 있냐는 것이다. 자신의 부인을 독살하고, 자신이 능욕한 14세 소녀를 자살하게 만든 스비드리일로프는 오래전에 양심을 팔았다. 그래서 그는 쾌락적으로 행동하고 악행을 하던 선행을 하던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끊임없이 겪는 갈등도 이 문제에서 출발했으리라. 적어도 라스꼴리니꼬프는 스비드리일로프처럼 완벽한 악인은 아니기 때문에 인간 본연의 양심과 그의 논리적 사상이 대립하는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인간 본연의 양심'은 무엇인가. 이 부분에서 기독교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는 모세의 십계를 참고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이런 기본적인 양심도 없다면 사회는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나폴레옹과 같은 비범한 사람만이 사회에 남게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완성시키는 양심이 없다면 비범한 사람들의 공동체(모든 공동체가 그렇겠지만)는 금방 와해되고 만다. 아무런 금기도 없는 사회가 도래하는 것이다. 소냐는 자신에게 무덤덤한 어조로 죄를 고백하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인간 본연의 양심은 어디 갔냐고 말한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죽인 사건은 세계를 향한 도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인간 본연의 양심의 경계를 시험한, 오랫동안 내려온 불문율을 깨뜨린 인류 본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은 우발적인 것도, 감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치밀하게 사전에 계획되어 시행된 범죄였으며 자신의 사상에 입각한 형이상학적 살인이었다. 그의 살인에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탐구하고 세계에 도전해보려는 동기가 있었다. 그것이 아무리 인륜적으로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는 노파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자 했고, 이 행위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고자 했다. 사실 그는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당연한 이치를 이미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비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벌은 자신을 피해갈 것이라고 은연중에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이 산산이 깨져버릴 때,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심리적 고통을 이 작품에서 다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갈등과 내면세계의 수심은 깊었고 잔인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그의 사상을 가슴에 안고 고립되었고 미쳐갔다. 그가 자백할 할 당시에도 진정한 갱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데, 이 대목에서 독자들은 라스꼴리니꼬프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고 차라리 신앙이었던 그의 사상에 얼마나 자부심이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마침내 그가 갱생하고 있다고, 부활하고 있다고 쓰고 있는데 그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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