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4일 월요일

독서보고 4장 보편적 문명의 시작 업로드 - 대학교

From : http://www.needreport.com/index.php?document_srl=322102
독서보고 4장 보편적 문명의 시작 업로드

독서보고 4장 보편적 문명의 시작

독서보고 4장 보편적 문명의 시작

독서보고 4장

[1948년, 세계과학자연맹의 과학자 헌장 요약]

"과학자라는 직업에는, 시민이 일반적인 의무에 대해 지는 책임 외에 특수한 책임이 따른다. "특히 과학자는 대중이 가까이 하기 어려운 지식을 갖고 있든가 또는 그것을 쉽게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지식이 선용되도록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과학자는 과학사회세계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1. 과학에 대하여 - 과학자는 과학 연구의 건전성을 유지하고, 과학적 지식의 억압과 왜곡에 대해 저항하며, 과학적 성과를 완전히 공표해야 한다.

2. 사회에 대하여 - 과학자는 자신의 분야가 당면한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문제들에 대하여 지니는 의미를 연구하고, 모든 지역의 생활 여건과 노동 조건을 평등하게 개선하기 위한 연구를 진척시켜야 하며, 그러한 지식이 실행에 옮겨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3. 세계에 대하여 - 과학자는 자신의 노력이 전쟁 준비의 방향으로 전환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해야 하며, 평화를 위해 안정된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는 세력을 지원해야 한다.

보편적 문명의 시작

노예제를 근간으로 하던 로마제국은 정복과 약탈로 체제를 지속하는 과정에서 제도와 법 그리고 도로와 건축 등의 기술에선 탁월했지만 기술 혁신에는 실패한다. 노예를 얻기위한 전쟁비용이 편익보다 더 커지자 로마의 경제는 침체되기 시작한다. 3세기에 이르러 로마도 '창조적 파괴'의 굴레로 넘어가게 된다. 그 후 중세가 시작되었다.

중세 유럽은 토지에 의존한 농업경제에 기초하였다. 과학은 종교의 한계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그러나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6~12세기에도 기술의 발전이 있었다. 중세는 더 이상 노예노동에만 의존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봉건제도가 주도한 중세는 기술의 전반적인 분야에서 근대로 넘어갈 수 없었던 시대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세는 '보편적 문명'을 향하여 사상적, 과학적 변화가 축적되는 기간이었다.

4.1 로마질서의 붕괴

로마 제국은 생산 없이 소비만 하는 노예제 국가였다. 노예제사회의 한계로 기술혁신은 없었고 경제는 정복과 약탈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비용이 편익보다 더 커지자 로마의 확장은 중지되었고 전쟁을 통해 유지되던 경제는 파탄이 나기 시작한다. 로마에 의해 정복되었던 피지배자들은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다시 권력을 잡기 시작했다.

로마 붕괴의 징조는 도로의 붕괴에서부터 나타났다. 로마의 경제력이 낮아지고 전반적인 제국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역들 간 사용되었던 도로들이 중세의 오솔길 같은 도로로 대체되기 시작되었다. 도로 대신 수로망이 이용되기 시작했다. 노예제가 붕괴되고 나서 산업은 피폐해졌다. 석재대신 목재가 채취되었고 운송과 가공 산업은 점점 사라져갔다. 로마의 법과 도로 그리고 지배체계의 붕괴는 그때까지 제도화된 서유럽의 고시 문명을 해체하였다. 화폐가 구매력을 잃자 도시민들은 생필품을 구할 수 없게 되었고 점점 농촌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부자들은 농촌에 있는 자신의 토지로 이동해 자신의 영지에 정착한 자유민들은 이용해 노예처럼 사용하기에 이른다.

토지소유자들은 노예대신 콜로누스1)를 이동하지 못하게 해야만 했다. 생활은 현지 생산품에만 의존하게 되고 이런 경제 구조는 생산에 필수 불가결한 인력을 생산지 현지에 매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르만 인들은 이러한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어떤 지역으로 문화를 이동시키면서 반유목적 농업에 종사했다. 이민족들이 로마 세계에 정착하며 이들이 가지고온 여러 문화, 관습, 기술들이 문명 내에 전파되었다.

로마의 환제들은 자신의 신을 버리고 기독교를 새 종교로 받아들었다. 점점 기독교가 득세하면서 사람들은 명예와 영광을 교회의 목표를 이루는 일에서 찾게 되었고 교회는 중세인들의 삶에 통제를 가했다. 로마의 지도체계를 대신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종교적 관행의 퇴보를 자초했다. 교회는 왕 뿐만 아니라 하층민들로부터 기증을 받아서 재산을 늘렸다. 교회는 국가를 조종하려했고 국왕은 교회를 지배하려고 하는 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싸움은 일반 주민들의 불만을 가중하는 법을 만들어 냈다.

7세기, 유럽에 이슬람이 등장한다. 이슬람의 유럽 진출로 지중해 세계의 통일성이 파괴되었고 동방과 교역이 단절되었다. 이로 인해 중세 유럽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슬람에 맞서기 위해 왕들은 기사를 양성했으며 이는 봉건제를 급속하게 확장시킨 계기가 된다.

4.2 보편적 문명의 시작

6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북유럽에서 초기 농업혁명이 발생 했다. 대표적으로 철이 농기구에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이 있다. 이시기에 대규모 철광산의 개발로 철이 군용뿐만 아니라 농업과 일산도구에 까지 사용됨으로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9세기 경 삼포제와 농경기구의 발달로 농업생산성이 증대되자 중세 초기의 농업방식이 북유럽 평원 지대로 확대되었고 유럽의 중심이 유럽 북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0세기엔 콩과 같은 작물이 대량으로 도입되어 식량생산의 발달을 가져왔다. 노예가 없어지기 시작하자 자유민들이 일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기술의 개량, 발전이 일어났다. 10세기부터 잉여 식량이 발생하자 몰락했던 도시가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도시에선 직공과 상인이 새로운 계급으로 등장했고 도시 공동체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11세기 중세 유럽은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나아가는 시기를 맞이했다. 도시의 탄생, 화폐경제의 시작, 기술적 발명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중세는 노예제 생산양식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고대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규정될 수 있는 근대 사이에 낀 시대이다. 이러한 중세를 '보편적 문명화 과정'의 시작 단계라고 할 수 있다.

4.3 중세의 기술 혁신

중세 초기 농업은 화전농법이 주로 이용되었었다. 이렇게 땅을 깊이 갈지도 못하고 비료도 충분히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토지를 쉬게 해서 지력을 회복시키는 휴경 농법이 필수적이었다. 8세기 말부터 중세유럽에선 이포제가 삼포제로 교체되었다 삼포제는 경작지를 삼등분해 한 구역은 쉬게 놔두고 두 곳에서 경작을 하는 형식이었다.

자료 (압축파일).zip

댓글 없음:

댓글 쓰기

가장 많이 본 글